Skip to content
onMay 06, 2014

자귀나무꽃을 찾아서 - 도종환

67a.jpg




갓 스물 넘기고 난 그 몇 해 여름 글을 읽다가

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게 하는 말들 만나면

책을 들고 나와 자귀나무 그늘에 누워

하늘 올려다보곤 하던 날들이 있었지요

허공을 부채깃으로 쓰다듬듯 부드럽게 출렁이는

자귀나무꽃 바라보면서 참 아름다운 꽃도 있구나

생각하였지요

 

깜깜한 밤 들판에 서 있는 것처럼 가야 할 길 보이지

않을 때도 있고 목에 줄이 묶인 짐승처럼 답답하기만

하던 날들 많았지만 어두운 날이 지나고 나면

새벽하늘처럼 빛나는 시간은 반드시 오리라 믿었지요

방황이 끝나지 않으면

벗겨진 무릎 쉬이 낫지 않으리란 걸 짐작했지만

생애의 대부분 고난이 예비되어 있을 줄

그땐 생각지 못했지요
 
자귀나무꽃처럼 고운 사람 만나 자귀나무꽃처럼

연분홍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되는 날을 꿈꾸었지요

나는 그때 스물몇 살이었으므로

 

복숭아 속살보다 더 단

자귀나무꽃 향기를 지닌 사랑을 기다렸지요

피 흘리는 사랑이 준비되어 있을 줄 몰랐어요

처절한 사랑이 오랜 날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

 

그때 난 스물몇 살

자귀나무잎처럼 풋풋하였으므로

내 슬픔의 뿌리를 찾으러 가는 발걸음이 

래지 않아 끝나고 내 근원의 물음도 몇 해가 가기 전에

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

그 일이 평생이 걸리는 일이라곤 생각지 못했지요

 

고통 속에서도 걸음을 포기하지 않으면

아름다운 결말을 만나리라 여겼지요

감당하기 어려운 이별과 오랜 아픔을 거치면서

사랑을 알아가는 것인 줄 몰랐어요

뜨겁게 살아야 함께 평화롭고 아름다운 날들을

만들어가는 것임을 생각지 못했어요

자귀나무꽃이 유월도 가장 뜨거운 날

왜 그렇게 곱게 피는지 알지 못했어요

그때 난 스물몇 살이었으므로




  현대시학 8月 / 2000年




?
  • mari 2019.06.11 01:30
   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별장에 가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딘가에서 사랑스럽고 그리움과 같은 꽃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. 마치 봄의 혼이 하늘에 방황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. 나는 '무슨 향기일까?'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곧 일어나 정원 안을 걸어다녔다. 그 향기는 정원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자귀나무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. 나는 그 나무를 껴안았다. 그러고서는 곧장 나무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. 그다지 높지 않은 곳에 큰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걸터앉아 꽃 향기를 맡으면서 황홀하여 넋을 잃고서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에 젖어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.

    -헬렌 켈러 자서전에서-

  1. 자귀나무꽃을 찾아서 - 도종환

    갓 스물을 넘기고 난 그 몇 해 여름 글을 읽다가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게 하는 말들 만나면 책을 들고 나와 자귀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 올려다보곤 하던 날들이 있었지요 허공을 부채깃으로 쓰다듬듯 부드럽게 출렁이는 ...
    Date2014.05.06 Views685
    Read More
  2. 랭보 - 취한 배

    도도한 강물을 따라 내려갈 때, 나는예인(曳引)자들1이 날 인도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.떠들썩한 인디언들이 그들을 깃발 기둥에 발가벗겨 묶은 뒤 과녁으로 삼아 버렸다. 플랑드르 밀이나 영국 목화를 나르는 나는 선구(船具)들2에 전혀 신경...
    Date2013.04.05 Views3546
    Read More
Board Pagination ‹ Prev 1 Next ›
/ 1
Designed by hikaru100

나눔글꼴 설치 안내


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.

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
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.

설치 취소

SketchBook5,스케치북5

SketchBook5,스케치북5

SketchBook5,스케치북5

SketchBook5,스케치북5

by mari

sketchbook5, 스케치북5

sketchbook5, 스케치북5