갓 스물을 넘기고 난 그 몇 해 여름 글을 읽다가
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게 하는 말들 만나면
책을 들고 나와 자귀나무 그늘에 누워
하늘 올려다보곤 하던 날들이 있었지요
허공을 부채깃으로 쓰다듬듯 부드럽게 출렁이는
자귀나무꽃 바라보면서 참 아름다운 꽃도 있구나
생각하였지요
깜깜한 밤 들판에 서 있는 것처럼 가야 할 길 보이지
않을 때도 있고 목에 줄이 묶인 짐승처럼 답답하기만
하던 날들 많았지만 어두운 날이 지나고 나면
새벽하늘처럼 빛나는 시간은 반드시 오리라 믿었지요
방황이 끝나지 않으면
벗겨진 무릎 쉬이 낫지 않으리란 걸 짐작했지만
생애의 대부분 고난이 예비되어 있을 줄
그땐 생각지 못했지요
자귀나무꽃처럼 고운 사람 만나 자귀나무꽃처럼
연분홍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되는 날을 꿈꾸었지요
나는 그때 스물몇 살이었으므로
복숭아 속살보다 더 단
자귀나무꽃 향기를 지닌 사랑을 기다렸지요
피 흘리는 사랑이 준비되어 있을 줄 몰랐어요
처절한 사랑이 오랜 날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
그때 난 스물몇 살
자귀나무잎처럼 풋풋하였으므로
내 슬픔의 뿌리를 찾으러 가는 발걸음이
오래지 않아 끝나고 내 근원의 물음도 몇 해가 가기 전에
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
그 일이 평생이 걸리는 일이라곤 생각지 못했지요
고통 속에서도 걸음을 포기하지 않으면
아름다운 결말을 만나리라 여겼지요
감당하기 어려운 이별과 오랜 아픔을 거치면서
사랑을 알아가는 것인 줄 몰랐어요
뜨겁게 살아야 함께 평화롭고 아름다운 날들을
만들어가는 것임을 생각지 못했어요
자귀나무꽃이 유월도 가장 뜨거운 날
왜 그렇게 곱게 피는지 알지 못했어요
그때 난 스물몇 살이었으므로
현대시학 8月 / 2000年